선릉.정릉.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131번지 일대

* 선릉 : 조선 제 9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릉

* 정릉 : 조선 제 11대 중종릉


선정릉을 방문 한건 찌는 듯한 여름의 시작이었습니다.


원래 이곳을 방문하기 위해 계획을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삼성동에 있는 어떤 회사에서 견적의뢰를 하면서 방문상담을 요청했던게 시작이었습니다. 그 이전에 견적을 내주었고 도면도 다 확인한 상태에서 새로운 내용이 없는데 갑자기 방문상담을 요청하는데 가기도 뭣하고....안가기도 뭣한....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하루종일 상담을 하고 견적을 내고 하는 일인데 방문을 요청하는 곳들을 모두 찾아다닐수도 없고, 또 방문요청을 하는  곳들이 방문할 필요도 없는 일이거나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고 견적내용에 관계없이 자기들 편의로 오라가라 하는 곳들이 많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미 견적을 내줬던 곳에서 제차 연락이 온 터이고 몇가지만 확인후 바로 발주를 내려고 한다 하니 안 갈수도 없는 노릇이었지요.


차를 몰고 방문요청지에 가보니 십몇층 짜리 건물인데 그 회사소유였습니다. 그런데....주차장에 차를 못들어가게 하는 겁니다!!!

상담을 요청해서 온것이라 해도 주차장이 협소해 방문차량은 들여보낼 수 없다 합니다. 어이가 없어서 방문요청한 담당자에게 전화를 해서 상황을 말했더니....(당연히 경비실을 바꿔달라고 해서 들여보내 줄꺼라 생각했음)... 그럼 자기도 어쩔 수 없으니 차를 딴데 대랍니다.


????? 

강남 삼성동 한복판에서 차를 대체 어디다가 대나요??

망연자실해서 그나마 한적한 곳에 차를 대고 주위를 둘러보니 휭...옆으로 주차단속반이 지나갑니다. 열심히 주변을 검색해보니 도보 십여분 위치에 선정릉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정릉 주차장에 차를 대고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갔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그 업체는 이미 다른 곳을 선정해 놓고서는 혹시나 가격을 좀 후려칠 수 있을까 해서 저를 부른것 이었습니다. 타 업체에서 이미 자신들 스타일에 맞게 셋팅해 놓은 것을 그대로 맞춰 달라고 하면 그걸 대체 어떻게 경쟁력 있게 해 줄수 있나요. 주차 할 곳이 없어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듣지 못한채 아주 무례하기 짝이 없는 방문요청업체와의 면담을 끝내고 나올때 화를 주체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선정릉 주차장까지 걸어오면서도 짜증과 화가 어떻게 제어가 되지 않을 듯 했습니다.


이대로 도저히 운전을 할 수 없을 듯 해서 가방을 차 안에 던져 넣고 선정릉의 숲으로......



선.정릉 능역에는 조선 제9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의 릉인 '선릉'과 11대 중종의 릉 '정릉'이 있습니다. 그런데 선릉이 동원이강릉의 형태라 서로 다른 3기의 릉이 있는 듯 합니다.



매표소와 왕릉역사관을 둘러본 후 조금 걷다보니 재실이 나옵니다.



재실의 바로 앞은 이렇게 강남의 한복판 입니다. 기존에 찾아봤던 다른 릉에서는 보지 못한 광경이라 이질적이기 까지 합니다. 이 때 이미 격양된 감정은 많이 차분해 졌습니다. 조금 전까지 저 도심을 걷던 나와는 또 다른 내가 이곳에 있는 듯 합니다.



앗....정릉으로 향하는 길이 공사중 입니다. 여름철 집중호우로 인한 침수를 예방하기 위해 우수정을 설치하는 듯 합니다. 정릉은 어떻게 생각하면 조선의 왕릉중 가장 많은 풍파를 겪고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하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조선왕릉들 이지만 그중에서도 정릉은 지대가 낮아 잦은 침수를 당했다 합니다. 더구나 임진왜란 때에는 능이 크게 훼손되기 까지 합니다. - 왜란이 끝난 후 일본이 국교 재개를 요청하자 조선에서는 능을 훼손한 이를 잡아 보내줄 것을 조건으로 하였고, 이에 조선과 왜의 중계자 역할을 하던 쓰시마도주가 조선에는 온적도 없는 일반 죄인 두명을 잡아 보냈으나 이 사실을 조선에서 알고서도 두명을 처형함으로써 마무리 지었다 합니다 -



아....가봤던 다른 릉들이 모두 낮은 구릉의 지형을 살려 완만한 강을 만들고 봉분을 조성한 후 곡장 뒷쪽으로 잉을 조성한데 비해 선릉은 지대가 낮다 하더니 능역과 봉분 전체가 낮습니다. 


아래에서 바라 볼때 이렇게 가깝게 보인 릉이 처음이라 가슴이 두근두근 합니다.


중종묘는 원래 희릉으로 고양에 있었다 합니다. 그러나 곧 첫번째 계비 장경왕후의 근처로 이장하고 능호를 정릉으로 고치게 됩니다. 그리고 훗날 두번째 계비 문정왕후에 의해 현재의 장소로 옮겨지게 됩니다. 문정왕후는 이곳을 길지라 하여 옮기고 훗날 자신이 그 옆에 묻히길 바라였으나 옮긴 장소가 홍수에 자주 침수되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홀로 태릉에 묻히게 됩니다. 이런 까닭에 중종 또한 왕의 무덤으로는 드물게 홀로이 단릉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원래 이랬던 것인지 조성된 시가지가 능역을 모두 갉아먹어 이리된 것인지는 알길이 없으나 홍살문까지의 진입로가 옆으로 나 있습니다. 



참도를 걷다 문득 돌아보니.....높은 빌딩들이 집어 삼킬듯 위압적 입니다. 아까 재실을 지나올 때는 막연히 도심과 참 가깝다 생각했던 마음인데... 이건 가깝다 말하기엔 너무 참담하게 능역을 침범한것 아닌가 싶습니다. 홍살문 바로 뒷쪽이 대로 입니다. 



정자각 바로 뒤에도 건물이 있네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많이 훼손한거 아닌가 싶습니다. 유일하게 북한에 있는 후릉(제 2대 정종)의 사진을 보곤 정자각 자리까지 밀고 들어온 논밭을 보고 개탄 했는데....오십보백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본 봉분입니다. 시야를 낮추지 않아도 잘 보이네요. 확실히 다른 능보다 낮긴 낮습니다. 오르기 전 까지는 가장 가까이 보이는 능이지만 위로 오르지는 못하게 되어 있어서 아쉽게도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혹시라도 봉분까지 오를 수 있는 관람로가 있을까 해서 몇번을 두리번거렸지만 안타깝네요.


이제 성종대왕의 선릉으로 향합니다.



릉 주변이 도심과 너무 가까웠던 것에 반해 선릉과 정릉 사이는 나름 울창한 숲을 이루며 떨어져 있어 한가로이 걷기 좋았습니다. 또 그 오가는 길이 언덕 그대로의 경사와 굴곡을 가지고 있어 그냥 숲길을 걷는 듯 합니다.


주변의 높은 건물도 바삐오가는 사람들도 시끄러운 자동차 소음도 없습니다. 조금 전 까지의 분노와 바쁜 스케줄도 없습니다. 바로 바깥은 대한민국 서울중에서도 가장 붐비는 강남 한복판인데 이곳은 마치 다른 곳인듯 합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시간속의 섬' 


선릉과 정릉을 단 한마디로 표현해야 한다면 이게 가장 맞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신들의 정원이라 불리우는 조선왕릉들을 방문 할 때마다 느껴왔던 한가로운 감정이었지만, 이질적인 주변 환경 때문인지 선릉과 정릉이 주는 감정은 확실히 더했던 듯 합니다.



느릿느릿 걷다보니 정현왕후릉에 먼저 도착합니다. 동원이강릉의 형식이지만 성종릉과는 꽤 떨어져 있고 광릉처럼 대칭형도 아니기 때문에 거의 독립된 단릉처럼 보입니다. 정릉과 마찬가지로 언덕배기에 조성되었다기 보다는 그냥 커다란 봉문처럼 보이는 낮은 릉입니다.


올라가 볼 수 없나 두리번 거리니 측면에 난간석주가 묻혀 있습니다. 장마때 토사가 쓸려가며 묻힌것이 드러난 것인데 그 자리에 그대로 보존하고 울타리와 안내판을 설치하여 둔것이 이채롭습니다. 현재 정현왕후릉의 난간석은 모두 온전한 상태로 과거에 보수를 한 잔재를 땅에 묻은것 아닌가 추정하고 있습니다. 



난간석주 옆으로는 낮은 계단이 있어 능역위로 올라가 볼 수 있습니다. 이질적이지 않게 잘 만들어져 있는 듯 합니다.




관람로는 측면으로 나 있기 때문에 이렇게 석상의 뒷 모습을 보게 됩니다. 중종릉과 성종릉의 나름 중간에 위치하기 때문에 그나마 도심과는 좀 떨어져 있는 듯 보입니다.



다시 성종의 릉으로 발길을 돌리면 위와 같이 측면으로 오를 수 있는 관람로가 나 있습니다. 정현왕후릉과 같이 측면으로 오르기 때문에 정면에서 사진을 찍을 수는 없지만 릉을 크게 훼손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관람로를 만들어줘서 고마운 마음입니다.



병풍석과 난간석이 모두 있습니다. 울타리 밖에서 보아야 했지만 어차피 완전히 공개된 릉역이라 해도 개인적으로 상계까지 침범하지는 않기 때문에 관람에 불편함은 없었습니다.


성종은 역대 조선왕들 중에서 가장 유교원리에 충실했던 군주로 알려져 있습니다. 때문에 유학을 신봉하던 당대의 신하들에게는 세종과 버금가는 또는 그 이상의 성군으로 평가 받았다 합니다. 일을 결정할 때 다른 어떤 왕들보다 신하들의 의견을 많이 듣고 중용하게 되었는데 이러다보니 대간의 힘이 강력해지게 됩니다. - 홍문관, 사헌부, 사건원 -


대간은 아주 사사로운 왕의 행동까지도 간섭하고 제약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나라에 작은 흉한 일이 있어도 왕의 성덕이 부족하다 비판하였다 하니.....과연 성종이 아니면 어떤 왕이 참아 냈을까 싶습니다.


다만...세자인 연산군은 왕을 사사건건 통제하려 드는 신하들의 모습을 보며 아버지와는 다른 생각을 했던 듯 합니다.



봉분에서 바라본 정자각 입니다. 이상스럽게도 릉을 향하지 않고 옆으로 비스듬히 틀어진 듯 보입니다. 정현왕후와의 동원이강릉으로 조성되어 있기 때문에 두 릉을 모두 아우를 수 있도록 중간쯤을 향한 듯 보입니다.



바로 바깥으로 보이는 오피스건물 입니다. 오백년의 세월이 함께 공존하는 듯 합니다. 다만 정릉에서 느낀것과 같이 지나치게 가까워서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바로 앞의 오피스거리와는 다른 시간이 흐르는 공간 입니다.



정자각에서 바라본 참도 입니다. 정릉과 마찬가지로 밖에서 홍살문까지의 길이 일직선이 아닙니다. 원래 그런것인지는 알수 없지만요.


선릉.정릉은 다녀본 여러 왕릉 중에서도 무척 기분이 좋았고 애착이 갔던 곳 입니다. 주변의 바쁜 풍경에도 아랑곳 않고 홀로 느릴 수 있어서 더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정릉과 선릉 사이의 오솔길을 걸으며 '아이들과 꼭 함께 다시 와야지' 다짐 했던 곳 입니다.


아직 못갔지만요....아껴두고 있습니다.



Posted by sara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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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릉에서 발길을 돌려 나오면 혜릉 입니다. 조선의 20대 왕 경종의 원비 단의왕후를 모신 단릉 입니다. 단의왕후는 경종이 즉위 전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혜릉은 세자빈묘인 원의 형식으로 조성되었습니다. 훗날 경종이 즉위 후 단의왕후로 추존 되어 능호도 혜릉으로 바뀌었습니다. 때문에 혜릉은 동구릉에 조성된 9기의 능 중 가장 규모가 작고 단촐합니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따라 이렇게 '묘'나 '원'이 '능'이 되기도 하고, '능'이 묘로 격하되기도 하죠.

단종은 세조에게 죽임을 당하고 노산군으로 격하된 후 봉분도 없는 처지였으나 훗날 숙종 때 단종으로 추존되며 '장릉'이 조성됩니다. 단종의 비였던 정순왕후 역시 노비로까지 격하되었고, 장례는 대군부인의 예로 치뤄졌으나 단종과 함께 복위되어 현재의 '사릉'이 되었습니다. 


또 광해군의 친모인 '공빈 김씨'의 묘는 광해군시절 '성릉'으로 조성되었으나 광해군 폐위와 함께 '성묘'로 격하되었습니다. 때문에 혜릉과는 달리 현재는 '묘'이지만 조성양식은 '능'의 그것입니다.




무석인과 무석인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고 하는데 능침에는 올라가 볼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홍살문 앞에서 찍어도 정자각과 능침, 비각이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아담합니다.



숭릉의 웅장한 정자각을 보고난 뒤라 그런지 더욱 작게 느껴지는 정자각. 실제로도 작습니다.



혜릉의 수복방역시 그 터만 남아 있습니다. 아쉽게도 수복방이 남아 있는 곳이 별로 없네요....

또 돗자리를 깔고 쉬자는 아이들을 다독여 발걸음을 옮깁니다. 동구릉에 와서 두 개의 릉만 보고 갈 수는 없지요.



이제 경릉으로 갑니다. 무더운 날이었는데 아직 아이들이 방전되지 않아서 다행.....



조선 24대 헌종과 원비 효현왕후와 계비 효정왕후의 삼연릉입니다. (동구릉 안내책자에는 효현왕후, 효정왕후로 적혀 있는데 릉 앞에 안내판은 '황후'로 되어 있네요) - 아마도 고종의 대한제국을 선포 한 후 선대왕들이 황제로 추존되었기에 황후로 기록된 듯 합니다.



조선 유일의 삼연릉 이라는데 능침은 올라가 볼 수가 없어서 아쉬움이 커지네요. 멀리서나마 석물의 간격으로 추측해 볼 뿐입니다. 



경릉의 참도. 박석이 넓게 깔려 있습니다. 


이제 관람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서둘러 원릉으로 향합니다.



길을 잘못 들었던 것인지 원릉의 정자각쪽으로 바로 접어 들었네요. 원릉은 조선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능 입니다. 

영조는 원래 홍릉에 정성왕후와 같이 잠들기를 바랬으나 결국 동구릉의 원릉에서 계비인 정순왕후와 누워있습니다. 영조 생전에 홍릉을 조성하면서 자신의 자리도 마련해 두었기 때문에 현재도 홍릉은 쌍릉의 양식을 간직한 단릉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를 두고 손자인 정조의 원망이다, 정순왕후의 시샘 때문이다....라는 말들이 있죠.



원릉의 예감.



원릉의 산신석과 비각입니다. 뭔가 이상한 것 없나요? 누워계신 분은 분명 두 분인데 비각은 세칸 입니다. 하나는 '영종대왕' 비석이고, 하나는 정순왕후, 나머지 하나는 훗날 고종시절 세워진 '영조대왕' 입니다.


Posted by sara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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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릉은 주로 도읍인 한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왕이 조상을 모시러 갈 때 가급적 하루만에 다녀올 수 있도록 하여 업무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한 것이기도 하고, 한양이 도읍이었으니 한양을 중심으로 릉이 형성되는건 어쩌면 당연한듯도 하다.


세종과 소헌왕후를 모신 영릉[英陵]과 효종과 인선왕후를 모신 영릉[寧陵]은 경기도 여주에 이웃해 있다.


한양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현재 주소지로 한다면 대부분 서울이나 구리, 남양주, 고양, 파주 등에 있는 능원들을 염두에 둔다면 꽤나 멀리 자리 잡으신듯 하다. - 방문 후 확인해 보니 영릉과 영릉 모두 천장(묘를 이전 함)되어 이곳으로 모셔졌다 -


안내도에서 보듯이 이름마저 같은(한문으로는 다르지만) 두 릉은 이렇게 이웃해 있다.


함께 있어서 영.영릉, 영녕릉, 영령릉으로 불리우긴 하지만 주차나 편의시설, 전시관 등의 대부분의 것이 세종대왕의 영릉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뭐랄까....세종대왕님은 조선 임금님들중 아이돌이랄까......





매표소를 지나면 세종대왕 시절에 발명된 관측장비들이 전시되어 있다. 나도 첨보고 처음 들어보는 이름들도 많다. 해시계만도 종류가 꽤 여러가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해시계는 '앙부일구'라고 한다. (경복궁안에도 있고 광화문사거리 세종대왕 동상앞에도 있는 그거)




야외전시장의 반대쪽에는 동상이 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세종대왕님과 같이 사진도 한번....

6살 8살 아이들인데 세종대왕이 대군시절 충녕이란것과 이름은 '이도'라는 것. 형들이 양녕과 효령이라는 것. 

아버지가 태종이고 그 태종이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인데 이방원이 동생들을 죽이고 왕이 된것 까지 알고 있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였고 그의 형이 2대 왕인 정종. 이방과 라는 것 까지.


뭔가를 가르친 적은 없고 그냥 같이 옛날얘기 하듯이 얘기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역사공부라는 개념도 아니고 정말로 그냥 재미난 동화나 옛날얘기 하듯.....


요즘은 둘이 누워 잠들기 전에 자기들끼리 역사퀴즈 내고 맞추기를 하다 잠들곤 한다.


아마 태조-정종-태종-세종-문종-단종-세조 까지는 왠만한 어른들 보다 더 잘 알지 싶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하게 된 경위와 사육신과 생육신들 까지 알고 있다. (단종릉인 장릉에는 아직 못가봤지만 단종비인 '정순왕후'릉인 '사릉'에도 이미 갔다왔다)



동상앞에서 한번 점프 샷. 아무리 찍어도 큰 놈은 뻣뻣하고 둘째 놈은 역동적이다.




세종대왕 영릉의 재실이다. 현재의 재실은 복원된듯 하고, 원래 재실은 매표도 바깥쪽에 터만 남아 있다.

재실 건너편에는 '세종전' 이라는 아담한 전시관이 있어서 유물등을 전시하고 있는듯 한데, 나올 때 보기로 했다.




이제 홍살문을 들어섰다. 홍살문부터 정자각까지 이어지는 참도는 가운데의 높은 곳이 '신도'라 하여 혼령이 지나는 길이고, 측면의 낮은 곳이 '어도'라 하여 왕이 지나는 길이다. 만인지상인 임금이 낮아지는 곳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참도가 가운데에 있고 어도가 양쪽에 있는 3도의 형식이다. 다른 곳은 2도였던 것 같은데??

(집에와 찾아보니 1970년대 세종대왕 성역화 사업을 하면서 잘못된 복원을 하였다 한다. 3도는 중국식의 황릉 양식. 실제로 '대한제국'선포후 조성된 고종과 순종의 '홍.유릉'은 참도가 3도로 조성되어 있다.)


릉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도 쉽게 알 정도면 이제라도 다시 복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잘못된건 알지만 그냥 황제릉이 좋으니까 그냥 냅두는건가?? 그렇다쳐도 왕도 걷지 못했던 신도를 저 수많은 방문객이 걷도록 두는 이유는 뭔지....

간단한 안내문이나 안내판만 있어도 좋을것을. 사진에서 처럼 참도 옆으로는 원래 나무들이 없었던 것인지 성역화 사업을 하며 밀어버린 것인지 모를 넓은 잔디밭이 있다. 그래놓고 울타리를 쳐 놓으니 신도를 밟지 않고 다니기가 더 어렵다. 이 무슨 앞뒤 안 맞는 복원인지 모르겠다.


암튼 의미를 아는 이상 신도로는 갈 수 없고, 아이들과 어도를 걷는다.



멀리 정자각이 보이고 뒷편으로 봉분이 보인다. 세종대왕릉인 영릉은 조선왕릉중 최초의 합장릉이다.

원래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헌릉(서울 서초)쪽에 쌍실로 능을 조영하여 세종 승하후 합장하였으나 예종 때에 입지가 불길하다 하여 이곳으로 천장되었다 한다. (문종과 세조가 소헌왕후의 소생)



헐? 생각지도 않았는데 봉분 앞까지 올라올 수 있다. 그것도 무려 봉분 앞까지 조성된 돌계단으로;;;

팔팔한 아이들이 먼저 후다닥 뛰어 올라가 기다리고 있다. 우측은 칼을 들고 있는 것을 보니 무석인인듯 하다. 즉, 관람객들은 하계까지 올라 올 수 있다는 것....



이렇게....하계까지 올라올 수 있다. 뒤로 중계와 상계가 명확히 구분된다.



조선왕릉은 봉분이 자리잡은 상계와 그 밑으로 중계, 하계로 명확히 높이가 구분된다. 문인상은 사진처럼 중계에 위치하며 무인상은 그 밑인 하계에 위치하는데 조선후기로 가며 문무의 차별?...격차가 없어지며 같이 위치하기도 한다.




아이들 바로 뒤에 보이는 것이 장명등이고 사진 좌측과 우측에 있는 기둥 같은 것이 망주석이다. 

봉분아래를 둘러싸는 병풍석은 생략되어 있고, 난간석만 있다. 봉분앞에 있는 큰 돌테이블 같은 것이 혼유석이다. 커다란 돌상처럼 생겨서 제사를 지낼때 음식을 놓는 곳인가 하고는 한다는데, 혼유석은 봉분의 주인인 영혼이 나와 노니는 곳이라 한다. 또한 무덤의 입구이기도 하다. 위에 사진에는 장명등에 중앙이 가려져 마치 커다란 하나로 보이지만 영릉의 혼유석은 두 개이다. 합장릉이니까.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동그랗게 생긴 다리가 고석)


세종대왕의 영릉을 보고 내려오면 효종의 영릉과 이어지는 산책로가 있는데 화재예방을 위해 5월부터 개방. 우리의 방문은 아쉽게도 4월 말이었다.



할수없이 다시 입구로 나와서 효종의 영릉에 방문하기로 하고 나오는 중에....큰 놈의 거침없이 하이킥.



아참! 나올 때 세종전에 들러서 전시물 보기로 했지!!


들어서자마자...


 '앗 이종무다!!! 아빠! 이종무예요!!!'


 헐...아이들이 그림만 보고도 나보다 더 잘 안다. 쓰시마정벌에 나선 이종무 그림이다. 이렇게 세종대왕 시절의 각종 자료들과 그 시절 제작된 편경과 편종들의 유물들이 복원전시되어 있다.


이제 날이 저물기 전에 효종의 영릉으로.....


사실 아이들도 힘들고 해도 기울어가서 그냥 갈까 했다. 그런데 예까지 와서 그냥 가면 효종께서 서운해 하실 듯 해서 언능 다녀오기로.

(다녀와서는 그 선택이 탁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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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녕릉세종대왕유적지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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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ra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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