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남양주시 사릉리에 '정순왕후(단종비)'가 묻힌 '사릉'의 인근에는 '광해군묘'가 있다.


길을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은데 교인묘지 내부를 통해 들어가야 한다. 누워서도 궁핍하고 고단한 상황을 벗지 못하는 느낌이라 애처롭기 까지 하다.


광해군묘를 찾아가는 방법은 따로 포스팅해 놓았으니 가시는 분들은 참고 하시길.


[사릉, 광해군묘, 임해군묘, 성묘(공빈김씨), 안빈묘 찾아가는 방법]


광해군묘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산59 (영락교회 공원묘지 내)



위에 링크한 찾아가는 길을 참고하여 영락교회 공원묘지로 들어서서 오르막을 한참 올라가다가 평지가 나올 때쯤 좌측으로 광해군묘 표지가 나온다. 폐위되었다 해도 왕이었던지라 나름 안내판이 잘 되어 있어 인근의 다른 묘에 비해 찾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다. 


마땅히 차를 둘 곳이 애매해 잠시 둘러볼 요량이면 길측면에 대 놓고 후딱 보고와도 될듯한데 오래 지체 할 생각이면 조금 더 들어가면 주차장이 있으니 대고 조금 걸어오는게 나을 듯 하다. 


(사릉지구 관리소에서 관리되는 묘인데 철문으로 닫혀 있긴 하나 잠겨 있진 않으니 견학 후 나올 때는 꼭 잘 닫고 나오세요)



철문을 열고 통과하여 흙길을 조금 내려오면 광해군묘가 보인다.



아....이게 참... 진입로도 마땅찮고 사진찍을 공간도 마땅찮고 아이들과 함께 하니 조심스러워 운신할 공간도 넉넉치 않다. 폐위되었다고는 하나 15년간 만인지상의 군주였던 이의 묘가 어찌 이런지.... 승자의 시각으로 남겨진 기록만으로도 아직까지 광해군에 대한 여러평이 엇갈리는 것을 보면 광해군이 폐위될 정도의 폭정이나 패륜을 저질렀다고 보기는 어려울것 같다.


친형인 임해군을 비롯한 여러 왕족들의 숙청이 반정군의 큰 명분중 하나였기는 하나 사실 왕이 되지 못한 상위 왕족들의 운명은 대부분 부와 영예를 누리되 왕권강화에 걸림돌이 되거나 반정군에 의해 이름이 오르내리면 사사를 면키 어려웠다. 다만 그 처리과정에서 대북파들의 주도에 대한 견제가 작용했고 광해군의 실리외교가 사대부들을 설득하지 못한것이 치명적이지 않았을까.


조선이 어떤나라인가. 유교와 명나라에 대한 사대와 의리.... 광해군의 패착은 논리와 명분에서 사대부를 누르지 못해 반정의 명분을 제공해 준 것이 아닐까. (그노무 명분.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어처구니 없는 '예송논쟁'만 봐도 그러하다......(혹자는 조선역사 최고의 키보드배틀이라고도...)



어떤 것이 진실인지 어찌 알까. 다만 앞으로도 광해군에 대해서는 긍정과 부정이 엇갈릴듯 하다. 그의 생전에도 그러했듯이.


폐위되어 제주로 유배를 간 후 부인과 며느리 아들이 차례로 홧병과 자결로 세상을 등졌지만 광해군은 67세로 나름 천수를 누리고 갔다 한다. (그 속은 어땠을지....)


유언으로 어머니묘가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 했다 하는데 그 때문인지 그 인근에 성묘(광해군의 생모 공빈김씨)가 있고....또 광해군에 의해 - 혹은 그의 묵인에 의해 죽은 형 임해군의 묘도 있다.


아빠의 영향을 받아서이겠지만 광해군. 우리아이들이 좋아하는 왕이다. '광종'이라 불려야 하는거 아니냐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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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릉에서 발길을 돌려 나오면 혜릉 입니다. 조선의 20대 왕 경종의 원비 단의왕후를 모신 단릉 입니다. 단의왕후는 경종이 즉위 전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혜릉은 세자빈묘인 원의 형식으로 조성되었습니다. 훗날 경종이 즉위 후 단의왕후로 추존 되어 능호도 혜릉으로 바뀌었습니다. 때문에 혜릉은 동구릉에 조성된 9기의 능 중 가장 규모가 작고 단촐합니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따라 이렇게 '묘'나 '원'이 '능'이 되기도 하고, '능'이 묘로 격하되기도 하죠.

단종은 세조에게 죽임을 당하고 노산군으로 격하된 후 봉분도 없는 처지였으나 훗날 숙종 때 단종으로 추존되며 '장릉'이 조성됩니다. 단종의 비였던 정순왕후 역시 노비로까지 격하되었고, 장례는 대군부인의 예로 치뤄졌으나 단종과 함께 복위되어 현재의 '사릉'이 되었습니다. 


또 광해군의 친모인 '공빈 김씨'의 묘는 광해군시절 '성릉'으로 조성되었으나 광해군 폐위와 함께 '성묘'로 격하되었습니다. 때문에 혜릉과는 달리 현재는 '묘'이지만 조성양식은 '능'의 그것입니다.




무석인과 무석인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고 하는데 능침에는 올라가 볼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홍살문 앞에서 찍어도 정자각과 능침, 비각이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아담합니다.



숭릉의 웅장한 정자각을 보고난 뒤라 그런지 더욱 작게 느껴지는 정자각. 실제로도 작습니다.



혜릉의 수복방역시 그 터만 남아 있습니다. 아쉽게도 수복방이 남아 있는 곳이 별로 없네요....

또 돗자리를 깔고 쉬자는 아이들을 다독여 발걸음을 옮깁니다. 동구릉에 와서 두 개의 릉만 보고 갈 수는 없지요.



이제 경릉으로 갑니다. 무더운 날이었는데 아직 아이들이 방전되지 않아서 다행.....



조선 24대 헌종과 원비 효현왕후와 계비 효정왕후의 삼연릉입니다. (동구릉 안내책자에는 효현왕후, 효정왕후로 적혀 있는데 릉 앞에 안내판은 '황후'로 되어 있네요) - 아마도 고종의 대한제국을 선포 한 후 선대왕들이 황제로 추존되었기에 황후로 기록된 듯 합니다.



조선 유일의 삼연릉 이라는데 능침은 올라가 볼 수가 없어서 아쉬움이 커지네요. 멀리서나마 석물의 간격으로 추측해 볼 뿐입니다. 



경릉의 참도. 박석이 넓게 깔려 있습니다. 


이제 관람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서둘러 원릉으로 향합니다.



길을 잘못 들었던 것인지 원릉의 정자각쪽으로 바로 접어 들었네요. 원릉은 조선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능 입니다. 

영조는 원래 홍릉에 정성왕후와 같이 잠들기를 바랬으나 결국 동구릉의 원릉에서 계비인 정순왕후와 누워있습니다. 영조 생전에 홍릉을 조성하면서 자신의 자리도 마련해 두었기 때문에 현재도 홍릉은 쌍릉의 양식을 간직한 단릉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를 두고 손자인 정조의 원망이다, 정순왕후의 시샘 때문이다....라는 말들이 있죠.



원릉의 예감.



원릉의 산신석과 비각입니다. 뭔가 이상한 것 없나요? 누워계신 분은 분명 두 분인데 비각은 세칸 입니다. 하나는 '영종대왕' 비석이고, 하나는 정순왕후, 나머지 하나는 훗날 고종시절 세워진 '영조대왕' 입니다.


Posted by sara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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