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정순왕후가 두 분이 계시다. (고려시대에도 한 분...)


내가 왕후까지는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두 분의 정순왕후는 기억을 할 수 밖에 없는 굵직한 사건과 연관된 분들이다.


한 분은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로 단종의 정비, 다른 한 분은 정순왕후(貞純王后 金氏)로 순조를 수렴청정한 것으로 유명한 영조의 계비이다.


오늘의 이야기는 비운의 왕비로 회자되는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가 잠들어 있는 사릉(思陵)이다.




사릉과의 인연은 남다르다. 사릉이 있는 곳 뿐만 아니라 그 주변 일대의 동네들을 실제 지번과는 상관없이 사릉이라고 지칭하곤 하는데 결혼전에 그 사릉에 거주하기도 했었다. (그니까...불광동 일대를 그냥 '연신내'라고 하듯이) 현재 주변에 있는 경춘선의 이름도 '사릉역'이다.


그러니 한때는 거의 매일 사릉 코앞을 왔다갔다 하고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사릉 바로 앞 도로를 다니면서도 그곳이 사릉인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릉입구와 도로 사이에 폭이 약 10여미터 되는 녹지공간이 있는데 그 공간에 가려 입구가 보이질 않는다. 


겨울이 되어 잎이 떨어지고 가지가 앙상해 지면 비로소 사릉의 입구가 보이긴 하는데 어차피 작년까지 비공개릉 이었기 때문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아이들을 태우고 그 앞을 지나던 중 '사릉 시범개방' 이라는 현수막을 보고 급히 차를 돌려 방문.

수년을 지나다니면서도 볼 수 없었던 곳에 비로소 입장하게 되었다.



이때가 2013년 3월. 잔디가 아직 누런 때를 벗지 못하고 있다. 수복방과 수랏간의 흔적은 찾지 못했고, 아담한 정자각과 비각이 남아 있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조선왕릉이 등재되면서 시범개방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 입구에 관광버스 한대가 서 있고 중년의 아줌마 아저씨들이 우르르 몰려와 있었다.


우르르 신도를 밟고 가는 사람들 뒤로 관리하시는 분이 '가운데로 가시면 안됩니다~!!' 하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분은 팩소주를 들고 다니며 여기저기 권한다.....하아.....



릉 주변엔 비교적 어린 소나무들이 많이 있다. 



처음부터 자연지형이 그랬던 것인지 훼손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측면에서 찍은 강(언덕)은 눈에 띄게 굴곡이 있다. 혹자는 정순왕후의 인생굴곡과 비유하기도 한다. 사진 우측에는 예감과 예감 뚜껑이 뚜렷하게 보인다. 이 예감뚜껑은 유일하게 현존하는 것이라 한다. (보통은 나무로 만드는 경우가 많아 남아 있기 힘들다고...)


해질녘 집에 가는 도중 잠시 들른터라 길게 있지 못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왔다.




그리고 몇달이 지나 아마도 7월쯤 이었던것 같다. 큰 녀석만 데리고 다시 사릉을 찾았다. 이렇게 즐겁게 같이 다녀주니 얼마나 든든하고 의지가 되는지 모른다. 



정순왕후 송씨는 열 다섯의 나이로 한 살 연하였던 단종과 혼인하여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단종에게서 왕위를 찬탈 한 후 단종이 노산군으로 격하됨에 따라 정순왕후 또한 군부인으로 격하되어 궁에서 쫓겨나게 된다. 동대문 밖에서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어렵게 살던 그녀는 세조가 내리는 식량과 집을 끝내 거절하고, 동네 부인들의 도움으로 생을 이어 갈 수 있었다. 청계천의 영도교(永渡橋)에서 단종과 이별한 그녀는 죽을 때까지 단종과 재회 할 수 없었다.


영월로 유배를 갔던 노산군(단종)은 끝내 유배지에서 생을 마치고 만다. 노비의 신분으로 강등된 정순왕후는 82세로 생을 마쳤는데 조선왕비중 2번째로 긴 수명이었다. 어릴적 그 파란을 겪고 남은 생이 어떠 했을지.....


세조(수양대군)는 일말의 미안함이 있었는지 그녀를 신분은 노비이나 노역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한다. (일설에는 배신의 아이콘 신숙주가 노비 신분의 정순왕후를 자신에게 달라고 했다는 말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라 한다)


(정순왕후 송씨의 생애는 위키백과 참조 http://goo.gl/UDIio2 )



지난 3월 방문때의 누런 때를 벗은 잔디는 초록이 찬란했다. 소나무의 개체수는 많았으나 아직 어린탓인지 원래 품종이 그런 것인지 여리고 갸냘픈 느낌이다. 


단종과 정순왕후는 긴 시간이 흘러 숙종 24년 비로소 복위되어 '사릉'이라는 능호를 받게 된다. 사릉은 다른 왕릉에 비해 그 규모가 작고 특이한 점은 릉 주변의 소나무 숲 사이로 아주 가까운 곳에 다른 무덤들이 군데군데 보인다는 점이다. 원래 릉 주변에는 가옥이나 다른 무덤을 쓸 수 없다. 그러나 정순왕후의 장례는 대군부인의 예로 치뤄졌었는데 이미 친정도 몰락한 후라 단종의 누나인 정혜공주 시가인 해주정씨 묘역에 묻히게 된다. 살아서도 고단하고, 죽어서도 고단한.....


그 후 복위와 함께 능호를 받게 되지만 정순왕후를 보살핀 공을 생각해서인지 주변의 묘들은 이장되지 않고 남아 있다. 정말 그 공을 높이사서 남겨 두었던... 단지 신경쓰지 않아 그리 되었건, 정순왕후에게는 이 편이 좋을듯 하다. 자신을 받아준 정씨 묘역이 자신 때문에 이전되면 맘이 편치 않을 듯.



능 주변 뿐 아니라 곳곳이 어리고 여린 소나무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아직 울창하다는 느낌을 들지 않는다. 알고보니 사릉의 능역 자체는 작은데 우측으로 넓은 부지가 있는데 이곳이 전통수목양묘장이다. 어린 소나무들이 이곳에서 묘목으로 자라나 전국의 궁.능.원에 식재되고 문화재 복원이나 보수를 위해 사용된다 한다. 


그런 내막을 알고 나니 세조가 잠들어 있는 광릉이 떠오른다. 광릉은 정순왕후가 잠든 이곳 사릉에서 불과 약15키로 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자동차로 30분 거리. 살아생전 단종과 정순왕후를 죽음과 비통함으로 내몰은 세조의 광릉에도 사릉에서 자란 수목들이 식재되고, 보수에 사용될까? 이미 세상에는 없지만 세조는 그렇다면 어떤 마음일까.....하는 생각들.



울타리를 쳐 놓아 봉분근처까지는 올라 갈 수 없다. 지난번 방문과는 달리 신도앞에는 안내 팻말이 있어 사람들이 올라가지 않는다.


아...정자각마저도 작다. 릉이 작으니 정자각인들 클 수 있으랴만은....



아래에서 바라본 봉분과 강. 굴곡이 뚜렸하다. 석물들 또한 무석인은 없고 전체적으로 작다 하는데...올라갈 볼 수 없으니 아쉽다. 관리하시는 분께 물어보니 '뭐 여기서 다 보이는데 올라가서 뭐하냐'는 대답이 돌아온다. 쩝...일반공개를 하지 않고 있으니 어찌어찌 절차를 밟으시라 설명...할 줄 알았는데.... 



사릉의 비각.



지난번 멀리서만 찍었던 예감을 가까이서 다시 찍었다. 두조각으로 쪼개져 있는 듯 한데 마침 새 두마리가 각각의 조각에 앉아 있다.



이렇게 소나무가 늘어선 옆길이 있다. 길이 길진 않으나 잠시 천천히 걸어보고 반대편길인 전통수목양묘장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왕릉에 가면 아이들과 같이 돗자리 깔고 잠시 쉬다 오는걸 즐기는데 사릉의 경우 일단은 임시개방인 상태이고, 규모에 따라 잔디밭도 크지 않다보니 왠지 그럴수 없는 분위기이고....벤치에 앉아서 잠시 쉬었다 가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정통수목양묘장에선 이렇게 어린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이것보다 더 어린 묘목들도 있고, 좀 더 큰 묘목들도 있다. 다른 왕릉에서는  찾을 수 없는 사릉만의 색다른 풍경이다.



재실은 관리사무실로 사용중인지 관람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문 틈으로 훔쳐보고 아쉬운 마음을 달랜다.



강원도 영월에 있는 단종의 릉인 장릉에는 사릉에서 가져와 심은 소나무인 '정령송'이 있다 한다. 두 분의 한이 조금이나마 가실까? 개인적으론 지금이라도 두 분을 함께 모시면 어떨까 싶은데 아마 남양주와 영월의 이해관계 때문에 그건 쉽지 않겠지...

(실제로 그런 의견이 나온바 있으나 무산되었다 한다)


사릉은 내 자주 지나다녔으니 훗날 영월의 장릉에 가게되면 단종께 꼭 안부라도 전해 드려야겠다.








[사릉을 가시려는 분들께]

* 사릉 주변에는 가까운 거리에 광해군묘, 임해군묘(광해군의 형), 성묘(선조의 후궁이자 광해군의 친모인 공빈 김씨묘), 안빈묘(효종의 후궁인 안빈 이씨묘]가 있습니다. 함께 돌아보시면 좋습니다. 아무래도 릉이 아니다보니 안내가 자세하진 않은데 먼저 찾아본 분들이 설명을 해 놓은 글들을 보고 저도 찾아가 봤습니다. 


하지만 나름 그쪽 지리를 알고 있는 저도 좀 헤메게 되더군요. 조만간 언급한 묘역들을 정리해서 약도를 한장 만들어 올려야 겠습니다.


물론 아주 가까운 거리에 고종과 순종을 모신 홍릉.유릉도 있지만, 홍유릉과 광릉은 따로이 방문 하시고 사릉지구에서 관리하는 묘역들을 트레킹코스로 묶어 하루방문 하면 딱 좋습니다.


Posted by sara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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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릉에서 발길을 돌려 나오면 혜릉 입니다. 조선의 20대 왕 경종의 원비 단의왕후를 모신 단릉 입니다. 단의왕후는 경종이 즉위 전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혜릉은 세자빈묘인 원의 형식으로 조성되었습니다. 훗날 경종이 즉위 후 단의왕후로 추존 되어 능호도 혜릉으로 바뀌었습니다. 때문에 혜릉은 동구릉에 조성된 9기의 능 중 가장 규모가 작고 단촐합니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따라 이렇게 '묘'나 '원'이 '능'이 되기도 하고, '능'이 묘로 격하되기도 하죠.

단종은 세조에게 죽임을 당하고 노산군으로 격하된 후 봉분도 없는 처지였으나 훗날 숙종 때 단종으로 추존되며 '장릉'이 조성됩니다. 단종의 비였던 정순왕후 역시 노비로까지 격하되었고, 장례는 대군부인의 예로 치뤄졌으나 단종과 함께 복위되어 현재의 '사릉'이 되었습니다. 


또 광해군의 친모인 '공빈 김씨'의 묘는 광해군시절 '성릉'으로 조성되었으나 광해군 폐위와 함께 '성묘'로 격하되었습니다. 때문에 혜릉과는 달리 현재는 '묘'이지만 조성양식은 '능'의 그것입니다.




무석인과 무석인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고 하는데 능침에는 올라가 볼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홍살문 앞에서 찍어도 정자각과 능침, 비각이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아담합니다.



숭릉의 웅장한 정자각을 보고난 뒤라 그런지 더욱 작게 느껴지는 정자각. 실제로도 작습니다.



혜릉의 수복방역시 그 터만 남아 있습니다. 아쉽게도 수복방이 남아 있는 곳이 별로 없네요....

또 돗자리를 깔고 쉬자는 아이들을 다독여 발걸음을 옮깁니다. 동구릉에 와서 두 개의 릉만 보고 갈 수는 없지요.



이제 경릉으로 갑니다. 무더운 날이었는데 아직 아이들이 방전되지 않아서 다행.....



조선 24대 헌종과 원비 효현왕후와 계비 효정왕후의 삼연릉입니다. (동구릉 안내책자에는 효현왕후, 효정왕후로 적혀 있는데 릉 앞에 안내판은 '황후'로 되어 있네요) - 아마도 고종의 대한제국을 선포 한 후 선대왕들이 황제로 추존되었기에 황후로 기록된 듯 합니다.



조선 유일의 삼연릉 이라는데 능침은 올라가 볼 수가 없어서 아쉬움이 커지네요. 멀리서나마 석물의 간격으로 추측해 볼 뿐입니다. 



경릉의 참도. 박석이 넓게 깔려 있습니다. 


이제 관람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서둘러 원릉으로 향합니다.



길을 잘못 들었던 것인지 원릉의 정자각쪽으로 바로 접어 들었네요. 원릉은 조선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능 입니다. 

영조는 원래 홍릉에 정성왕후와 같이 잠들기를 바랬으나 결국 동구릉의 원릉에서 계비인 정순왕후와 누워있습니다. 영조 생전에 홍릉을 조성하면서 자신의 자리도 마련해 두었기 때문에 현재도 홍릉은 쌍릉의 양식을 간직한 단릉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를 두고 손자인 정조의 원망이다, 정순왕후의 시샘 때문이다....라는 말들이 있죠.



원릉의 예감.



원릉의 산신석과 비각입니다. 뭔가 이상한 것 없나요? 누워계신 분은 분명 두 분인데 비각은 세칸 입니다. 하나는 '영종대왕' 비석이고, 하나는 정순왕후, 나머지 하나는 훗날 고종시절 세워진 '영조대왕' 입니다.


Posted by sara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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